2025. 3. 22. 14:18ㆍ생각의 습관
반갑습니다. 효명입니다.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생각이라는 게 정리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많다 보니까, 글쓰기가 일처럼 느껴지고 귀찮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손이 잘 안 갔던 것 같아요.
최근에는 마케팅 회사를 들어가게 되면서, 인스타그램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업무 계정을 만들어 매일 피드를 관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스타를 넘겨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어요.
사실 저는 ADHD가 있어서, 한 번 무언가에 몰입하면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SNS를 잘하지 않았고, 인스타그램도 설치하지 않았었죠. 그런데 ‘업무용’이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인스타그램이 이제는 꽤 많은 시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피드를 넘기다가 우연히 ‘살아 있는 동물들이 식재료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게 되었어요.


근육이 꿈틀거리는 개구리가 뜨거운 국물에 담기고, 통돼지 바비큐를 위해 살아 있는 돼지를 끌고 오는 장면이 영상으로 올라와 있었죠. 대부분의 댓글은 비슷했습니다.
“보기 불편하다.”
“살아 있는 동물에게 이럴 수가 있냐.”
“굳이 저렇게 고통스럽게 죽여야 하나.”
처음엔 저도 공감했어요. 당연히 불편하고, 괴로운 장면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근데... 어차피 먹을 거잖아.”
결국 우리는 그 동물을, 그렇게든 저렇게든 먹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왜 그 과정이 고통스럽게 보이는 순간에만 분노하고, 불편해할까?
먹을 거라는 건 알고 있으면서, 그 고통의 장면만은 보고 싶지 않다는 태도. 결국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 불쾌하기 때문에, 그 장면 자체를 없애고 싶어 하는 거 아닐까?
그 불쾌함은 생명을 위한 연민이 아니라, 자기감정을 지키기 위한 회피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 사람들의 반응이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나아가, “저건 위선이다.”라는 판단까지 들었죠.
고통이 보이지 않는 소비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비되는 곳은 같지만 그 소비에 달려오는 감정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인공지능은 원래 이 사회는 그런 시스템으로 되어있다고 말해요. 소비는 권장되지만 도적적 불편함이 외면되는 게 바로 현대 사회라고요. 그리고 사실은 모두가 그 위선 안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들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그 과정을 알고도 먹는 사람이고, 고통을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소비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렇다면 나 역시 모순 속에 있는 건데,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 역시 고기를 먹고, 그 과정을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서도 결과물인 음식 앞에서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젓가락을 들죠. 그런데 왜 나는 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느꼈을까요?
왜 나는 이런 불쾌함을 느끼고, 불편함에 머무르고 있을까?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걸까?
나는 그들보다 더 낫다고 마음속으로는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 도덕적 우월감 같은 것 말이에요.
음, 근데 정말로 우월감을 느끼고 우쭐했냐 그건 아니고, 나는 그 사람들보다 낫고 싶었다기보단,
내가 느낀 이 불편함과 진심이 가볍게 취급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고작 몇 초 남짓 인스타 릴스에서도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게 되네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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